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되며 갈리아에서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으나 브루투스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인척이었던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맞서야 했던 세력이 많고 카이사르가 어렸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술라를 피해 다녀야 했고 사비니 지방으로 피신했었다가 비티니아에 있을 시기에 해적에게 붙잡힌 적인 있는데 몸값으로 20 탤런트를 요구했는데 자청해서 50 탤런트로 올려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이 덕분인지 잠을 잘 때 해적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명령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몸값으로 풀려나게 되자 군대를 모아 해적들을 처부시고 아시아의 총독에게 넘겼으나 처벌을 늦추가 직접 끌고 나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면서 술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기원전 77년에 돌아가는데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하나둘 포섭해 나가 그 세력은 개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커진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호민관 출마 시에 율리아와 그의 남편 마리우스의 초상을 들고 나와 연설을 하는 등 술라의 반대편임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젊은 아내가 죽었을 때 추도연설을 하는데 이는 그때까지는 하지 않던 행동이라 새로움과 인정 많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세력을 얻기 위해 수많은 돈을 썼는데 관직을 얻기 전에 1300 탤런트라는 큰 빚을 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이 법과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으로 보이고 잘 사용했습니다. 그의 세력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처벌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됐을 때 법정에 서게 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게 해아 한다고 한다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직접적인 물리력을 사용한 공격에는 우선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과 자신의 세력은 보호하고 적들의 세력을 약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일중에 하나는 그의 아내 (두 번째 아내 ) 폼페이아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 자신은 그녀를 믿지만 그런 의심 때문에 이혼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와 폼페 이아의 명예를 지켰으나 이것 역시 정략결혼에 의한 결정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스페인 총독으로 임명되어 갈 때 빚 때문에 문제가 되자 크라수스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도움이 필요할 시기였기 때문에 빚에 대한 보증을 서 스페인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스페인에서는 10개의 보병대를 신규로 편성하여 총 30개의 보병대로 만들어 로마에 복종하지 않던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내부 정치도 훌륭하여 스페인을 떠날 때는 대장군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는 집정관 선거에 나가기 위해 개선식을 포기하고 출마하기 위해 로마로 복귀하였고 집정관이 되어 토지분배문제를 다룬 법률을 제출하는데 보통 이런 법률은 호민관들이나 내는 법률로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약혼시켰고, 피소의 딸과 결혼하는데 피소를 집정관에 당선시키면서 정략결혼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2번째 부인 폼페 이아와 염문이 있었던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에 당선되도록 도왔는데 클로디우 스는 키케로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없애는데 협력했습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도 매력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군인으로서도 강력한 모습과 열렬한 지지를 받아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10여 년간 800여 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으며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런 지지는 아마도 솔선수범하는 그의 모습과 부하들에게 재산과 명예를 골고루 나눠주어 부하들이 부하면 자신도 부자라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던 중 갈리아의 벨가이 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세력이 강해지자 갈리아 지방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자 많은 정치가들이 그에게 와 정치자금을 빌리고 그 세력에 일부가 되겠다고 약속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아피우스(사르디니아의 총독), 네포스(스페인의 지방총독)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2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들도 함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리아 지방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게 되는데 알레시아에서 성안에 17만이라는 적군과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온 30마 대군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위험에 빠져을 때 양쪽에 장벽을 세우고 전쟁을 진행하여 승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갈리아에서 만들어온 자금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다시 키우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시작하는데 갈리아 땅과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루비콘강에서 고민하다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면서 아리미눔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리미눔이 점령되자 로마는 밀려드는 피난민 때문에 혼란에 빠져들었고 카이사르를 막지 못한 폼페이우스에게 비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폼페이우스에게 있는 군대는 카이사르보다 많았지만 이미 선수를 빼앗긴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떠나게 되었고 카이사르는 로마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잡기 위해 따라간 카이사르는 초반에는 위험하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작전을 세워 결국 승리하게 되지만 중간에 브루투스 등 많은 장군과 병사들에게 아량을 베풀면서 진행하였고 알렉산드리아 까지 가 폼페이우스의 사망까지 보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대담한 성격에 매혹당했고 결국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세우고 시리아로 떠났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아 카이사리온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로 간 카이사르는 아시아를 정벌하고 친구 마티우스에게 전쟁소식을 이렇게 알립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이겼노라
그리고는 아프리카를 정벌하였고 로마인들은 그에게 종신 1인 집정관이라는 자리를 주어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점차 커져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그를 왕으로 선포하기 위한 원로원의 모임이 있던 날 수많은 불길한 징조를 보고 았으나 그를 암살하려는 세력의 꼬임에 빠져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게 됩니다. 즉 자신을 너무 많이 믿었거나 주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는 부분마저 부족하여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라 보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가는 길이 독재라기보다는 로마를 위하는 길이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나온 생각의 결과일 거라 추측되지만 진실은 이미 없어진 지 20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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